[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4) 상수학 대가, 소강절 아들부터 9대손 앞날까지 동양학/상식백과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4) 상수학 대가, 소강절 아들부터 9대손 앞날까지 손금보듯 신들린 점괘 적중률… 그의 정체는?

결혼 첫날밤, 소강절은 부인을 재워놓고 밤새 점을 치고 있었다. 그가 궁금했던 건 이 첫날밤 행사로 자식이 생겼을까 하는 것. 점을 쳐보니 과연 아들이 들어섰다는 점괘가 나왔다. 내친김에 손자와 그 다음 후손들의 앞날까지 점을 쳤다. 그러던 중, 9대손에 이르러 불길한 점괘가 나왔다. 9대손이 역적 누명을 쓰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소강절은 임종을 앞두고 유품 하나를 남겼다. “이것을 9대손에게 물려주고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풀어보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 소강절 초상화

●9대손의 목숨을 구한 점괘

300년 후, 소강절의 9대손은 정말 역적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9대조 할아버지의 유품을 열어 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고, 드디어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지체하지 말고 이 함을 형조상서에게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는 그 길로 형조상서를 찾아 갔다. 형조상서는 300년 전 대학자인 소강절의 유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나와 예를 다해 유품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유품을 받기 위해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서까래가 내려앉으며 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져온 함 속에 있었던 소강절의 편지 내용이었다. 거기엔 “당신이 대들보에 깔려 죽었을 목숨을 내가 구해주었으니, 당신은 나의 9대손을 구해 주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서는 그 길로 재수사를 명했고, 9대손의 무죄를 입증해 주었다.

9대손의 운명까지 예측할 정도로 그의 점복술은 그야말로 최고 경지였다. 소강절의 생애에 관해선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대신 이 같은 신비한 얘기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 기막힌 예지력 때문에 그는 신비한 점쟁이의 대명사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강절은 수리(數理)를 성리학적으로 완성한 상수학(象數學)의 대가이다. 그의 예지력은 영감이나 직감이 아닌 바로 ‘수(數)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숫자로 천지(天地)의 이치를 헤아리다

박근혜 “창피한줄 아셔야지” 노기 폭발하…세계최강 北폭풍부대 맞설 정예군단 뜬다육군, 60시간 연속 잠안재우는 훈련 논란전두환 지은 ‘현대판 아방궁’ 내부 살펴보…中 불법어선 막는 해상특수기동대 공채해보…연금복권 1등 당첨자 분석하니 놀라운 결과…소강절(邵康節·1011~1077)은 북송 시대의 유학자이자 시인으로, 북송5자(주렴계, 소강절, 장재, 정호, 정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의 꿈을 키웠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옛 사람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더 옛날의 사람과도 소통하였는데, 나는 지금 내 주위 사방(四方)에도 못 미치는구나.”하며, 집을 떠나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도(道)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 후, 다시 나가지 않았고 더 이상 과거공부도 하지 않았다.

진정한 소통은 입신양명 같은 외적 확대가 아니라 우주와 직접 연결되는 내면의 확장이라고 깨달은 것일까.

이 무렵 이지재가 소강절이 학문을 즐긴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 이지재는 주렴계의 스승인 목수의 제자로 고문에 정통한 학자이자 관리였다. 이지재는 소강절에게 물리(物理)와 성명(性命) 공부를 권했다. 뜻이 깊으면 그 방면에 반드시 스승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런데 소강절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스승이 제 발로 찾아와 스승 되기를 청했다. 이때부터 소강절은 춘추를 배우고 역학(易學)을 전수받았다. 이지재는 그의 잠재력과 학문적 그릇을 꿰뚫어 보았다. 훗날 소강절의 사상이 주자학(신유학)의 사상적 기틀이 된 것을 보면 이지재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소강절은 이지재로부터 도교의 연단술에 운용되던 선천도(先天圖)를 전해 받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선천역학’이라는 역학의 새로운 해석체계를 세웠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는 단순한 원리에서 시작된다.

가일배법은 하나가 둘로 나뉘는 법칙으로 2 0, 2 1, 2 2, 2 3… 2 n식의 배수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배로 분화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만물생성의 이치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소강절은 숫자 ‘4’에 주목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4’라는 수의 변천과 순환일 따름이다. ‘춘·하·추·동’과 ‘역·서·시·춘추’로부터 시작된 하늘과 인간의 네 국면은 그 순서대로 생(生; 낳고), 장(長; 자라고), 수(收; 수렴하고), 장(藏; 저장한다)하는 사이클을 가지고 2배수씩 분할된다. 그렇게 분할되어 낳은 것 중에는 ‘인·의·예·지’ 같은 윤리적인 이치도 있고, ‘문왕·무왕·주공·소공’ 같은 역사적 인물도 포함된다.

이런 식으로 확장해 가면 우주만물과 그 시공간을 모두 헤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장수장의 운명적 리듬을 통해 만물의 운명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소강절의 대표 이론인 원회운세론의 ‘원(元)·회(會)·운(運)·세(世)’는 우주의 시간단위로서 이것은 ‘연·월·일·시’의 주기성과 통한다. 즉, 원(元=12회)은 우주의 1년이고 지구의 시간으로는 12만 9600년에 해당하고, 회(會=30운)는 우주의 한 달이며 지구시간으로는 1만 80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운(運=12세)은 우주의 하루로서 지구시간으로 360년이고, 세(世)는 우주의 한 시간, 지구시간으로는 30년이다. 이로써 인류를 포함한 만물의 역사는 ‘원회운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준칙을 갖게 되었고, 천지(天地)와 인간은 같은 패턴의 시간성 안에서 물리와 생리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회운세와 더불어 관물내편과 관물외편 그리고 성음율려를 더해 대작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완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예지력은 ‘초월적 능력’이라기보다, ‘숫자’와 숫자에 연결된 이치를 통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관찰, 즉 관물(觀物)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편견의 주체인 ‘나’의 판단을 소거해야 한다. 그래서 소강절은 ‘나로써 사물을 보(以我觀物)’지 않고, ‘사물로써 사물을 보기(以物觀物)’를 강조한다.

결국, 소강절에게 관물은 주체를 만물 속에 깃들게 하는 동시에 만물이 스스로의 이치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우주만물이 되고, 내 마음의 움직임은 곧 천지자연의 변화와 다르지 않다. 이를 일컬어 ‘심법’(心法)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수의 이치를 꿰고 마음의 변화를 읽으면 만사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예지력의 원천인 셈이다.

“몸은 천지 뒤에 태어났지만 마음은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네. 천지도 나로부터 나오는데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리!”
▲ 소강절이 집필한 ‘매화역수’.
●천명(天命)을 깨달은 자의 자유

그러나 그는 이 앎의 위험성을 경계했다. 만일 “수를 써서 지름길로 가려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왜곡”하는 것이고 그렇게 “억지로 취해서 반드시 얻어내려 하면 화와 근심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욕에 머물러 “요행을 바라는 것은 천명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을 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올바름이 바로 도가가 유가의 수양과 만나는 길을 열었으며, 신유학의 기틀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성리학의 토대인 북송5자 중에 소강절이 들어가게 된 연유다.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뤄양(陽)에서 살면서 당대를 주름잡던 사상가인 사마광, 장재, 정명도, 정이천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몸과 사유는 그만큼 자유로웠다. 스스로 ‘유가’임을 선언했지만 다른 북송의 현인들과 달리 불교나 도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도교의 이론을 잘 활용했고, 또한 그의 시 중에는 ‘불가의 가르침을 배우며’라는 시가 있을 정도로 유·불·도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었다.

무엇보다 “학문이 즐거움에 이르지 않으면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이나, 정명도가 쓴 그의 묘비명, 즉 ‘그는 편안했을뿐더러 이루기도 했다.’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천명을 안다는 것은 인생역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앎 그 자체가 삶이자 자유였다. 때문에 그의 길은 늘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

“눈앞의 길은 모름지기 널따랗게 만들어야 하느니, 길이 좁으면 자연 몸을 둘 곳이 없네. 하물며 사람들을 다니게 하는데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안도균 감이당 연구원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11210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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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별자리는 유불선 합치된 종교관”<세계일보> 동양학/상식백과

“별자리는 유불선 합치된 종교관”<세계일보>입력 2012.01.10
"제주도에서나 보이는 ‘남극노인성’은 무병장수를 비는 별자리입니다. 세종대왕은 천문관을 서귀포로 보내 남극노인성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남극노인성을 보면 나라가 평안해지고 무병장수한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지요.”

‘별자리 전문가’로 통하는 윤상철(52·사진)씨는 요즘 주역 강의하랴,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인근 부남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세종대왕이 만난 우리 별자리와 그림전’에서 별자리 설명하랴 눈코뜰새가 없다. 회계학과 출신으로 샐러리맨 생활 도중 만난 주역 모임에서 우연히 접한 조선시대 천문도에 대한 호기심이 별자리처럼 그의 운명으로 다가왔다. 그가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천문 자료를 번역하고 해석하느라 보낸 세월만 사반세기, 외로운 세월이었고 외로운 연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주역의 대가인 대산 김석진 옹의 제자인 윤씨는 그동안 중국 송대의 유학자 소강절의 역작 ‘황극경세’를 완역했고, 조선 세종 당시 천문 설명서인 천문류초(天文類秒)를 최초로 통번역했다. 최근에는 ‘세종대왕이 만난 우리별자리’ 3권을 출간해 별자리 알리기에도 매진하고 있다. 이제 그는 기상청 산하 국가기상위성센터와도 별자리 프로젝트 수행 이야기가 오갈 정도의 독보적인 천문 전문가로 우뚝 섰다.

지난 8일 오후 부남미술관에서 만난 윤씨는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택했지만, 궁중 안에서는 불교를 믿었고, 도교식으로 별자리에 무병장수를 기원하기도 했다”면서 “이는 유불선이 합치된 종교관”이라며 별자리 신앙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제갈공명이 북두성에게 빌었듯이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칠성에게 빌었죠. 또 죽으면 관 바닥에 일곱 개의 구멍이 뚫린 칠성판을 넣고 그 위에 시신을 눕히는 것도 북두칠성께 잘 보살펴 달라는 뜻입니다.”

북두칠성에 담긴 영혼과 환생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이 영혼을 인도해서 28수(별자리) 중 하나인 귀수(鬼宿)로 보냅니다. 그래서 귀수 안에 시체 기운의 모임이라는 뜻의 적시기(積尸氣)라는 별이 있는 것이죠. 죽은 영혼들이 이곳에 있다가 남두육성이 다시 살려서 세상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생명을 소원할 때는 남두육성에게 빕니다.”

도교나 불교에서도 별자리를 중시했다. 윤씨는 “특히 북극성을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도교에서는 자미대제(紫微大帝), 인도의 북두만다라에서는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도교에서는 태상삼관북두진경(太上三官北斗眞經) 등을 통해 북두주(北斗呪) 28수주(二十八宿呪) 등을 외면서 무병장수를 빌고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는 물론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을 탱화로 표현하여 칠성각에 모셨습니다. 칠월칠석에는 칠성님(칠성원군, 칠성여래)에 대한 재(齋)를 올리며 집안의 무병장수를 기원했습니다.”

그는 별자리 신앙에 대해 “길흉화복을 살핌으로써 미래의 화를 미리 조심한다는 기복적인 성격이 강하다”며 “15세기 유학자 매월당 김시습의 견해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별을 존경하는 것은 예(禮)이나 별에 제사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별을 존경한다는 것은 별 등의 변화를 살펴서 인간으로서 움직여야 할 때를 잃지 않고자 함이다.”(매월당집)

윤씨는 “세종대왕 당시의 별자리 연구 수준은 서양보다 200여년 앞선 것”이라며 “서구식 별자리 이야기에 익숙해진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별자리 윷놀이, 자기 별자리 찾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세종대왕이 만난 우리별자리와 그림전’은 부남미술관에서 16일까지 열린다. (02)720-0369

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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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자리에 앉아 궁상떨며 공부하다. 我的日常&D.i.a.r.y.



공부를 확실히 하는 김에 해보자 했다.
한데 이것 저것 걸리는 게 많아진다.

특히나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공부하면서 가르치고..
또한 너무 어린 아그들이 떠들기만 하면
가르치는 맛도 없어 오지 말라 하고..
하고 싶은 이들만 골라서 가르치다 보니 참힘들다.
ㅎㅎ

공부하는 자도 충족되는 기본 자본이 필요한 법인데.
궁지에 몰린 쥐같다.
자꾸만 다른 쪽으로 돌아가면서 다른 궁여지책을 마련해보고자
머리를 굴리게 된다.
차분히 있어보이는 몸뚱이건만
그 안은 수많은 생각덩이를 안고 굴리니 꼬락서니가 우습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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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200] 조선시대판 문화유산 답사기,『택리지』 동양학/상식백과

[고전의 향기 200] 조선시대판 문화유산 답사기,『택리지』

- 이백 번째 이야기

2012년 1월 9일 (월)

조선시대판 문화유산 답사기,『택리지』

새해가 시작되는 즈음 읽을만한 고전으로는 어떤 책이 있을까? 필자는 조선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를 추천하고 싶다. 『택리지』는 실학의 열풍이 우리의 국토와 역사,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던 시기, 우리의 산천과 그 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까지를 담아낸 책이기 때문이다. 이중환의 호는 청담(淸潭) 또는 청화산인(靑華山人)이며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참판 진휴(震休)의 아들로 성호 이익의 재종손(再從孫)이자 남인의 핵심 집안이었다. 그가 살아간 영조 시대는 집권세력인 노론의 탄압을 받아 남인이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시대였다. 『택리지』의 발문에 ‘떠돌아다니면서 살 집도 없어서’라는 표현에서 그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중환은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만은 않았다.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했음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국토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산수와 생리(生利), 인심을 관찰하여 『택리지』라는 불후의 저술을 남겼다. 『택리지』를 저술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저자 자신이 쓴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黃山江) 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하면서, 말미에 신미년(1751년)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저자가 61세 되던 무렵에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의 네 분야로 나누어져 있다. 「사민총론」에서는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민(農工商民)과 달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을 설명하였고,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개관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팔도총론」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곤륜산 한 지맥이 대사막의 남쪽으로 뻗어 동쪽으로 의무려산이 되었고, 여기에서부터 크게 끊어져 이에 요동(遼東)의 들이 되었다. 들을 지나서 솟아 백두산이 되었는데, 『산해경』에서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라는 것이 이곳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달려가며 두 강을 끼었고, 남쪽을 향하여 영고탑(寧固塔)이 되었으며, 등 뒤로 한 가지를 뻗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 팔도가 있는데, 평안도는 심양과 이웃하였고,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였으며, 다음으로 강원도는 함경도와 이어졌다. 황해도는 평안도와 이어졌고, 경기도는 강원도와 황해도의 남쪽에 있다. 경기도의 남쪽은 충청도 및 전라도이며, 전라도의 동쪽은 바로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바로 옛날 변한ㆍ진한 땅이었고, 경기ㆍ충청ㆍ전라도는 바로 옛 마한과 백제 땅이었다. 함경ㆍ평안ㆍ황해도는 바로 고조선ㆍ고구려 땅이었고,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 땅이었다. 그 흥하고 멸망함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나라 말기에 태조 왕건이 나가서 삼한을 통합하여 고려를 세웠으며, 우리 왕조가 운(運)을 계승하였다. 동ㆍ남ㆍ서쪽은 모두 바다이고, 홀로 북쪽 한 길만이 여진ㆍ요동ㆍ심양과 통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 그 백성은 유순하고 근신한다. 길이는 3천리에 걸쳐 있으나 동서는 천 리도 못된다. 바다와 닿은 남쪽은 (중국)절강성의 오현ㆍ회계현의 사이와 맞닿을 수 있다. 평안도의 북쪽 의주는 국경 수읍(首邑)이며, 대략 (중국)청주(靑州)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대저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있다.

[崑崙山一枝 行大漠之南 東爲醫巫閭山 自此大斷 是爲遼東之野 渡野 起爲白頭山 卽山海經所謂不咸山 是也 精氣北走千里 挾二江 向南爲寧固塔 背後抽一枝 爲朝鮮山脈之首 有八道 曰平安 隣瀋陽 曰咸鏡 隣女眞 次則曰江原 承咸鏡 曰黃海 承平安 曰京畿 在江原黃海之南 京畿之南則曰忠淸及全羅 全羅之東 卽慶尙也 慶尙 卽古卞韓辰韓地 京畿忠淸全羅 卽古馬韓百濟地 咸鏡平安黃海 卽古朝鮮高句麗地 江原別爲濊貊地 其興滅未詳 唐末王太祖 出而統合三韓 爲高麗 而我朝繼運矣 東南西皆海 獨北一路 通女眞遼瀋 多山少野 其民柔謹 局促長亘三千里 東西不滿千里 際海而南者 可値浙江吳會之間 平安之北義州 爲界首邑 約可當靑州 國大抵 在日本中國之間]
▶ 《朝鮮疆域總圖》(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 실려 있는 [朝鮮全圖]

이중환은 백두산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팔도의 각 지역에서 존재했던 국가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고려 태조의 삼한 통합, 조선의 고려 계승 등 역사적 뿌리를 기록하고 있다. 팔도에 관한 기록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뿌리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 그래서인지 단군에 관한 기록도 매우 자세하다.

옛날 요임금 때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평안도 개천현 묘향산 박달나무 아래 석굴에서 변화하여 태어났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고 마침내 구이(九夷)의 군장이 되었는데, 연대와 자손은 기록할 수 없었다. 후에 기자가 나와서 조선에 봉해져서 평양을 도읍으로 삼고 손자 기준(箕準)에까지 이르렀는데, 진나라 때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축출되었다. 바다를 건너 전라도 익산군에 도읍을 옮기고, 이름하기를 마한이라 하였다. 기씨 땅의 경계는 『사기(史記)』에 상세하지 않지만, 진한ㆍ변한과 더불어 이를 삼한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한 나라 선제 때 일어나, 경상도를 다 점유하였다. 진한ㆍ변한 여러 지역을 신하로 복종시켜, 신라라 이름 하고 경주를 도읍으로 삼았다. 박(朴)ㆍ석(昔)ㆍ김(金) 세 개 성씨가 다시 번갈아가면서 왕이 되었다. 위씨는 한나라 무제 때 멸망했다. 한나라에서 백성만 옮겨가고 땅은 버림에 미쳐, 주몽이란 자가 말갈로부터 평양에 근거를 두어 고구려라 이름하고 칭하였다. 주몽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온조가 또 한수(漢水) 이남에 나누어 근거하여, 마한을 멸망시키고 백제라 이름 하였으며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당나라 고종 때 멸망하였다. (당나라에서) 땅을 버리고 철수하여 돌아가자, 두 나라 땅은 다 신라로 들어왔다. 말기에 궁예와 견훤이 나눈 바가 되었는데, 고려에 이르러 그것을 통일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치연혁의 대략이다.

[古堯時 有神人 化生於平安道价川縣妙香山檀木下石窟中 名曰檀君 遂爲九夷君長 年代子孫 不可記 後箕子出 封于朝鮮 都平壤 至孫箕準 秦時 爲燕人衛滿所逐 赴海遷都於全羅益山郡 號爲馬韓 箕氏地界 不詳於史氏 與而辰卞 是爲三韓 赫居世 興於漢宣帝時 盡有慶尙道 臣服辰卞諸地 號新羅 都慶州 朴昔金三姓 更迭而爲王 衛氏 亡於漢武帝時 及漢移民棄地 有朱蒙者 自靺鞨 據平壤 號稱高句麗 朱蒙沒 其次子溫祚 又分據漢水以南 滅馬韓 號百濟 都扶餘 高句麗與百濟 俱滅於唐高宗時 棄地撤歸 二國地 盡入新羅 末爲弓裔甄萱所分 至高麗一之 此我國建置沿革之大略也]

이중환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에는 삼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신라는 진한과 변한의 여러 지역을 복속했고, 백제가 마한을 멸망했다는 역사 인식은 조선후기 남인 실학자들의 대체적인 역사인식이었다. 「팔도총론」의 후반부는 고려의 역사가 중심을 이룬다.

신라 이전은 삼국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하여 문적(文蹟)이 적어, 고려부터 비로소 기록할 수 있었다. 고려 때는 사대부의 이름이 아직 크게 세워지지 않아서, 서리(胥吏)로부터 경상(卿相)이 된 자가 많이 발생했다. 한 번 경상이 되면 그의 아들과 손자도 사대부가 되어서 다 경성(京城)에 집을 두게 되니, 경성이 마침내 사대부의 연못과 늪이 되었다. 외읍인(外邑人)은 드물게 조정에 등용된 자가 있었는데, 쌍기가 과거 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취함에 미쳐서는 외방인도 점점 조정에서 두드러진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북에는 무신(武臣)이 많고, 동남에는 문사가 많았다. 말기에 문풍이 크게 떨침에 미쳐서는, 간간이 중원(中原)에서 행한 과거에 합격한 자도 있었는데, 이것은 원나라와 통한 것의 효과였다. 지금에 이르러 세상에 대족(大族)으로 칭해지는 것은, 고려 경상의 후예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대부의 자손이 갈라진 내력도 고려부터 비로소 기술할 수 있었다.

[新羅以前 三國戰爭 不休 然文蹟少 自高麗 而始可述矣 高麗時 士大夫之名 未大立 多起自胥吏而爲卿相者 一爲卿相 則其子與孫 爲士大夫 咸置家於京城 京城遂爲士大夫淵藪 而外邑人 罕有登于朝者 及雙冀制科擧取士 外方人稍稍得顯仕于朝 然西北多武臣 東南多文士矣 及季世文風大振 間有中中原制科者 此通元之效也 至今 以大族稱於世者 多高麗卿相之後裔 則士大夫之胄派來歷 自高麗 而始可述矣]

위에서 보듯 『택리지』는 지리지이면서도, 산수와 역사, 인물, 사건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택리지』를 인문지리서의 완성판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팔도총론」에 이어서는 「복거총론」이 나온다.「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였는데, 인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상업과 경제에 관한 내용도 풍부히 설명하고 있다.
그럼 『택리지』에서는 어떤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표현하였을까? 저자는 살 만한 곳을 택하는 데 있어 첫째 조건으로 ‘지리’를 꼽았다. 여기서 지리라는 것은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한 곳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가 아니라 풍수학적인 지리를 의미한다. 즉 ‘지리를 논하려면 먼저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에는 들판과 산의 형세를, 이어 흙빛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본다’고 기록하였다. 이어 ‘생리’를 살 만한 곳의 주요 조건으로 들었다.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닌 까닭으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라고 생리를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 성주, 진주를 제일로 꼽았으며, 특산물로는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임천과 한산의 모시, 안동과 예안의 왕골을 들었다. 세 번째로는 ‘인심’을 들었다. 저자는 ‘그 곳 풍속이 좋지 못하면 자손에게도 해가 미친다’ 하여 풍속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면서,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여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였다. ‘오히려 사대부가 없는 곳을 택해서 살며 교제를 끊고 제 몸이나 착하게 하면 즐거움이 그 중에 있다’고 한 대목에서도 보이듯이 이중환에게 있어서 집권 사대부의 권위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 조건으로는 ‘산수’를 들면서 ‘집 근처에 유람할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함양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저자는 산수의 경치가 훌륭한 곳으로는 영동을 으뜸으로 삼았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이 이책을 베껴서 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요람(形家要覽)』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택리지』를 필사하면서 제목을 자신의 취향대로 붙인 것이다. ‘동국산수록’, ‘진유승람’ 등은 산수를 유람하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동국총화록’은 우리나라의 물산이 종합되었다는 의미로, 상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된다. ‘형가요람’은 풍수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지은 제목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제목은 『택리지』가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택리지』가 저술된 시기 조선 사회는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국학 연구 분야에도 큰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사대부 학자 중에는 금강산 등 우리나라 산천을 여행하는 붐이 일고 각종의 기행문이 기록되었다. 『택리지』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국토를 여행하는 시대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널리 유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에는 『택리지』를 들고 전국 답사에 나서기를 권한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수와 풍물, 인심을 만나면서, 역사와 전통의 멋을 음미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요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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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175] 문자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 동양학/상식백과


글의 정신과 의취가 이 세상 어디를 막론하고 만물에 두루 퍼져 있으니,
이 세상의 만물은 글자로 쓰거나 글로 짓기 이전 상태의 문장인 것이다.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기신정의태 포라육합 산재만물 시특불자불서지문이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경지에게 답함(答京之)> 《연암집(燕岩集》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 이치를 내포한 온 세상의 만물은 아직 글자로 쓰거나 글로 짓지만 않았을 뿐 저마다 훌륭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세상에 담겨져 있는 이치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면 모두 독서라고 보는 사고인 것이다. 타성에 젖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런 감흥도 없이 하는 독서는 차라리 대자연과 벗하며 노는 것만도 못하지 않을까.

옛날 상고시대에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하늘의 형상과 땅의 이치를 관찰하고 새와 짐승의 문양을 잘 살펴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이것이 주역의 시초이다. 복희씨의 자연에 대한 독법을 현대적으로 말하면 대상을 기호화하고 추상화한 것이라고나 할까. 또 공자는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를 남긴 분이다. 아마도 주역의 원리를 사색하며 독서하였을 법하다.

이 글은 경지(京之)라는 자를 쓰는 연암의 친구에게 주는 편지에 나온다. 경지라는 이는 성대중, 홍대용 등과 교유하기도 한 이한진(李漢鎭 : 1732~1815)으로 추정된다. 이한진은 전서와 예서를 잘 쓰고 퉁소를 잘 불었다 한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문장의 근본 원리에 대한 담론이다. 이 글 뒤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사기의 문장만 보지 말고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비를 잡는 어린아이의 비유와 함께 실려 있다.

글을 좀 써 본 사람들, 특히 시인들은 연암의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이런 이치를 대개 자득하는 경우가 많다. 시에서 구현하는 언어들이 아무래도 자연의 어휘들이 많은 까닭에 그 자연이 하나의 시이고 거룩한 스승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구절을 읽지 말고 그 구절 이면에 있는 시인의 마음을, 시인의 마음보다 시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로 짓기 이전 상태의 문장, 즉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빛깔을 보아야 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가 아닐까.

나아가 이 글을 단순히 문학으로 한정해서 읽는 사람은 독서를 깊이 하는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세상의 어떤 분야라도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자연과 세상에서 홀로 자득하며 신천지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때가 온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태산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고 쿵푸의 여러 권법이 동물들의 격투 자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현대의 건축가가 까치집이나 벌집에서 공학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다 그렇다. 또 스위스의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라는 사람이 사냥하다 자신의 옷에 붙은 도꼬마리에서 섬유부착포(찍찍이)를 고안해 성공한 것이나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 만델브로(Benoit B. mandelbrot)가 해안선에서 프랙탈 이론(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을 발견해 낸 것 등, 좋은 예들이 많다. 이런 것은 한문에 빠져 조선 사회와 상고시대를 오고가는 고루한 필자보다는 현명한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요컨대 자연과 세상만큼 풍부하고 훌륭한 장서와 스승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주변의 사물을 온통 스승과 책으로 만든 뒤에야 한 방면의 일가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그 삶의 현재가 얼마나 황홀할까.

글쓴이 :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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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장나라의 철면가녀(번역 : 장미저택) F.I.L.M-영화/드라마외

다른 분들의 말처럼
제인에어와 여러가지를 접목한 드라마인 듯 했다.
장나라의 히스테릭한 면,
그리고 아직은 어려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어찌 보면 정말 아동틱하기도 했다. ㅎㅎ
그러나 어쩌다보니 결말까지 다 보게 된 드라마.
쌍어 노래가 좋긴 했지만..
엄청 우려먹긴 했다. ㅎㅎ
우리나라에서는 장미저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铁面歌女.
사람들이 중국판 아내의 유혹이라고 하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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